먼저 적힌 하루
오늘 안개는 아홉 걸음짜리다. 사무실에서 골목 어귀까지 걸어보면 안다. 아홉 걸음 만에 간판의 색이 지워지면 어제보다 두껍다는 뜻이고, 열두 걸음이 걸리면 얇다는 뜻이다. 아홉 걸음. 두꺼운 날이다.
두꺼운 날은 사람들이 뭔가를 늦게 알아차리는 날이다. 그래서 나는 두꺼운 날의 문 두드림 소리를 유심히 듣는 버릇이 있다.
문을 두드린 손님은 흰 가운 위에 낡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병원 기록실에서 일한다고 했다. 밤새 근무하고 바로 온 얼굴이었다.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아니, 발견했다기보다는… 자꾸 발견하게 돼요."
"매일 같은 걸 발견한다는 뜻인가요."
"네. 퇴원 기록이요. 오늘 것을 정리하다 보면, 서랍 안에 내일 날짜로 된 게 이미 들어 있어요."
나는 찻잔을 들다가 멈췄다. 순서를 잃은 사람은 이미 만나 본 적이 있다. 순서를 미리 아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필체는요."
"모르는 손이에요. 근데…" 손님이 잠깐 말을 골랐다. "낯이 익어요. 누구 글씨인지는 모르겠는데, 기울기가 낯이 익어요."
나는 그 말을 종이에 적지 않고 머릿속에만 두었다. 기울기가 낯익다는 건 필적을 안다는 것과 다르다. 그건 손의 습관을 안다는 뜻이다.
기록실은 병원 지하에 있었다. 서랍은 잠겨 있었고, 열쇠는 기록실장만 가지고 있다고 했다. 손님도 여는 방법은 몰랐다. 다만 아침마다 서랍이 이미 열려 있고, 안에 내일 날짜의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할 뿐이었다.
나는 자물쇠 앞에 앉았다. 크게 쓰지 않는 마법을 아주 조금, 숟갈 하나만큼 꺼냈다. 자물쇠 안쪽의 공기를 살짝 떠서 냄새를 맡는 정도.
냄새는 두 겹이었다. 비, 그리고 소독약.
세 번째 겹이 없었다. 기름 냄새가 없었다.
손님의 소매에서 났던 냄새는 셋이었다 — 비, 기름, 소독약. 그건 오래전 일이다. 이번 것은 둘뿐이다. 부두의 기름이 빠져 있었다.

같은 사람이 쓴 종이라면, 이번엔 부두를 거치지 않고 왔다는 뜻이다.
나는 그 사실을 접어서 마음 한쪽에 넣었다. 기름이 빠졌다는 건 이 사람이 이제 창고에 들르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애초에 다른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둘 다 가능했고, 둘 다 불편했다.
손님이 서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보여줬다. 오늘 날짜보다 하루 앞선 날짜, 그리고 세 줄.
『아침, 병원. 낮, 병원. 밤, 사무실.』
세 줄. 어디서 본 형식이었다. 창고 상자 안의 예순 장과 같은 틀이었다. 다른 건 이번엔 딱 한 장뿐이라는 것.
"기록실장님한테는 말씀드렸나요."
"아니요. 말하면 제가 미쳤다고 할 거예요. 아니면 제가 쓴 거 아니냐고 하겠죠. 제 손이 아닌데."
나는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에 얕게 눌린 자국이 있었다. 위에 다른 종이를 놓고 눌러 쓴 흔적. 아래에 깔렸던 종이는 없었다. 누군가 이 종이 한 장만 쓴 게 아니라, 여러 장 중 한 장을 여기 남긴 것이다.
"이 서랍 말고, 비슷한 서랍이 병원에 더 있나요."
손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은 없어요. 근데… 이 서랍, 원래 제 담당이 아니었어요. 두 달 전에 담당이 바뀌면서 제가 맡게 됐어요."
두 달 전. 나는 그 숫자를 소리 내어 되짚지 않았다. 첫 손님이 순서를 잃었다고 찾아온 것도, 창고 열쇠를 내가 만든 것도, 전부 두 달 전이었다.
두꺼운 안개의 날에는 서랍 안 종이의 날짜가 실제로 하루씩 밀린다고 손님이 덧붙였다. 얇은 날에는 종이가 아예 없거나, 날짜가 오늘과 같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창밖을 봤다. 안개는 여전히 아홉 걸음이었다. 두꺼운 날. 오늘 밤 저 서랍에는 또 하루 앞선 종이가 놓일 것이다.
안개가 두꺼운 날마다, 누군가는 내일을 먼저 세어 두고 있다.
이건 시계를 맞추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부두의 시계는 오늘 하루만 맞춰 놨었다. 이 서랍은 매번, 안개의 두께에 맞춰 내일을 미리 적어 둔다. 기준을 하나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준을 먼저 만들어 두는 것.
나는 손님에게 종이를 하루만 빌리겠다고 했다. 손님은 순순히 내줬다. 가지고 있기 무서웠다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골목에서 우산 접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돌아봤을 때는 안개뿐이었다. 아홉 걸음짜리 안개는 사람 하나를 완전히 지우기에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 종이를 책상에 펼쳤다. 날짜를 다시 봤다. 내일이 아니었다. 처음 손님이 문을 두드렸던 그날이었다. 이미 지나간 날짜가,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서랍에 넣지 않았다. 대신 접어서, 예순 장의 상자를 아직 열지 않은 채로 둔 창고 열쇠 옆에 나란히 두었다.
두 개의 종이가 나란히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순서를 잃은 사람과 순서를 미리 세는 사람이, 어쩌면 같은 사람의 두 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아직은 추측일 뿐이었다. 추측은 접어 두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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