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화분의 자리
오늘 떨어진 손님은 열두 살쯤 되어 보였소. 발밑이 부드러워졌는데도 놀라 소리치지 않았소. 뿌리 사이에 등을 부딪친 뒤, 교복 바지에 묻은 흙부터 천천히 털었소.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소. 대신 왼손 손바닥에 둥근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소. 조금 전까지 무언가를 세게 쥐고 있었던 자국이었소.
"여기가 어디예요."
"기억 도서관이라오. 나는 이끼씨. 예순일곱 해째 여기 앉아 있소."
아이는 서가보다 자기 손을 먼저 내려다봤소.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더니 빈 주먹을 만들었소.
"가지고 오려던 걸 위에 두고 왔나 봐요."
"여기 오는 손님들은 대체로 그렇소."
"뭘 두고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나는 앞장서서 서가 사이로 걸었소. 아이는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왔소. 발소리가 가벼웠지만, 어느 화분 앞을 지날 때마다 잠시씩 느려졌소. 남의 잎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소. 다만 잎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소.
아이의 화분은 낮은 칸에 있었소. 열두 해치고는 잎이 적지 않았으나, 잎과 잎 사이가 지나치게 넓었소. 무언가가 자랐다가 뽑혀 나간 자리처럼 빈 흙이 군데군데 보였소.
검게 마른 잎은 없었소.
그 대신 가장 안쪽에 아주 작은 잎 하나가 접혀 있었소. 마르지도 않았고, 푸르지도 않았소. 잎맥이 안으로 말려 빛을 받지 못하고 있었소.
"저게 저를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아마도 그렇소."
"아까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잎은 손님이 말해 줘야 안다고."
나는 아이를 바라봤소. 지난번 손님이 노란 잎 앞에서 물었던 말이 떠올랐소. 끝나지 않은 기억은 검게 마르지 못한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었소.
"맞소. 내가 아는 건 잎의 모양뿐이오. 무엇이 접혀 있는지는 손님만 알 수 있소."
아이는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았소. 접힌 잎에 손을 대지는 않았소. 왼손의 둥근 자국을 흙 위에 겹쳐 보듯 손바닥만 펼쳤소.
"이 자리에 원래 다른 잎도 있었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소. 화분의 빈자리에는 오래전에 잎이 떨어진 흔적과, 처음부터 아무것도 나지 않은 흙이 함께 있었소. 둘은 아주 오래 들여다봐도 구별하기 어려웠소.
"잊어버린 게 많으면 여기 오는 줄 알았어요."
"오래 잊고 있으면 오게 되오."
"그럼 잊어버린 걸 또 잊으면요?"
아이의 물음은 낮았소. 뿌리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소. 흙이 젖은 자리에 작은 원이 생겼다가 곧 스며들었소.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책갈피를 꺼냈소. 마른 잎을 덮어 더는 자라지 못하게 하는 얇은 책갈피였소. 다른 주머니에서는 새 잎을 하나 꺼냈소. 아직 어느 기억도 적히지 않아 연하고 투명한 잎이었소.
"잊고 싶은 기억에는 책갈피를 꽂을 수 있소. 간직할 기억에는 새 잎을 틔울 수 있소."
아이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소. 책갈피와 새 잎을 번갈아 보았소. 오래 고르는 얼굴이었지만, 망설이는 얼굴은 아니었소.
"아무것도 안 할래요."
나는 책갈피와 새 잎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소. 고른 이유는 묻지 않았소.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일도, 때로는 가장 오래 걸려 도착한 선택이오.
아이는 그제야 접힌 잎을 건드렸소. 손톱 끝이 닿자 잎이 아주 조금 벌어졌소. 안쪽에는 글자도 얼굴도 없었소. 다만 둥글고 희미한 눌림 자국 하나가 잎맥 사이에 남아 있었소. 아이의 왼손에 있는 것과 같은 크기였소.
"제가 두고 온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소. 나는 기다렸고, 아이는 끝내 더 말하지 않았소. 대신 화분 가장자리의 빈 흙을 손가락으로 한 번 고르게 다듬었소.
돌아갈 때가 되자 발밑의 흙이 다시 부드러워졌소. 아이는 몸이 떠오르기 직전, 서가 맨 끝을 가리켰소. 그곳에는 내 화분이 놓여 있었소. 예순일곱 해 동안 내가 적어 꽂은 잎들이 빽빽하게 자란 화분이었소.
"저 화분에도 빈자리가 있네요."
아이가 올라간 뒤에야 나는 내 화분 앞으로 갔소. 잎은 모두 푸르렀고, 아직 한 장도 마르지 않았소. 하지만 가장 오래된 잎들 사이,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의 빈자리가 있었소.
그 자리가 전부터 있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했소.
남의 잊은 자리를 지키는 동안, 내 빈자리를 세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나는 그날의 일을 새 잎에 적었소. 아이가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는 것, 접힌 잎 안쪽에 둥근 자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 화분에도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 있다는 것을 적었소. 새 잎을 꽂으려다 잠시 멈췄소.
빈자리 옆의 흙이 조금 젖어 있었소. 방금 떨어진 물방울 때문인지, 오래전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소. 나는 새 잎을 그곳에서 한 칸 떨어진 자리에 꽂았소. 그리고 예순일곱 해 만에 처음으로, 밤이 오는 동안 내 화분 곁을 떠나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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