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마른 국화
이번엔 소리가 달랐소. 마른 낙엽 밟는 소리도, 흙 무너지는 소리도 아니었소. 물기 있는 것이 스치는 소리였소. 그러더니 뿌리 사이로 손님이 내려왔소.
일흔넷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소. 옷매무새는 단정했고, 소매 끝까지 흙 한 점 없었소. 다만 오른손에 국화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소. 아직 시들지 않은, 그러나 막 피어 있는 것도 아닌 국화였소.
"여기가 어디예요."
"기억 도서관이라오. 나는 이끼씨. 예순일곱 해째 여기 앉아 있소."
할머니는 주위를 둘러봤소. 서가와 화분들, 그 사이를 오가는 나를 눈으로 좇았소.
"손에 뭘 쥐고 오는 사람은 드물다고 들었는데."
"누구한테 들었소."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나는 웃지 않았소. 웃을 자리가 아니었소. 대신 손을 내밀어 서가 쪽을 가리켰소.
"손님 것도 여기 있소. 저쪽이오."
일흔넷 해를 산 사람답게 화분에는 잎이 빽빽했소. 검게 마른 잎도 여럿 있었소. 그런데 그중 한 장이 달랐소. 검지도, 그렇다고 푸르지도 않았소. 노랗게, 마르는 중이었소. 아직 마르지 않은 채로.
할머니는 그 잎 앞에 서서 오래 움직이지 않았소.
"이건… 왜 이런가요. 다른 것들이랑 달라요."
"아직 안 끝난 것이오."
"안 끝났다니요."
"마른 잎은 끝난 기억이오. 이건 아직 끝나지 않았소. 그래서 노랗기만 하고, 검어지지는 못했소."
할머니는 국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소. 꽃잎 몇 장이 손가락 사이에서 살짝 눌렸소.
"저는 매년 이맘때 이 꽃을 사요. 근데 올해는 사다 놓고… 어디에 둘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나는 더 묻지 않았소. 어디에 두려던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건 손님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었소.
"그런데 이끼씨는… 왜 안 물어보세요. 왜 저한테 이 꽃이 뭐냐고, 저 잎이 왜 그러냐고 안 물으세요."
그 물음에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소. 오래전부터.
"물으면, 손님은 나를 위해 대답을 지어야 하오. 나는 그 짓는 걸 원치 않소. 잎은 손님이 말해 줘야 아는 것이지, 내가 캐물어서 아는 게 아니오."
"그럼 아무도 말 안 하면요."
"그럼 나는 모르는 채로 여기 있는 것이오. 예순일곱 해째, 모르는 채로도 잘 있소."
할머니는 그 노란 잎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소. 부스러지지 않았소. 아직 여물지 않은 것이었소.
"저는 여기 왜 왔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오. 다만 발밑이 물러졌으니, 뭔가를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것이겠지."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책갈피 하나를 꺼내 보였소. 낡고 얇은, 나무껍질로 만든 것이었소. 다른 손에는 새잎이 될 씨앗을 쥐고 있었소.
"나는 이 두 가지밖에 못 하오. 잊고 싶으면 책갈피를 꽂아 드리고, 간직하고 싶으면 새 잎을 틔워 드리오. 고르는 건 늘 손님이오."
할머니는 그 두 가지를 번갈아 봤소. 그러다 노란 잎으로 다시 눈을 돌렸소.
"근데 이건… 아직 안 끝났다면서요. 그럼 저건 어느 쪽인지도 아직 모르는 거 아니에요?"

끝나지 않은 기억은, 책갈피도 새 잎도 아직은 아니오.
할머니는 그 말에 조금 웃었소. 웃음이라기보다는, 숨을 길게 내쉬는 쪽에 가까웠소.
"그럼 저는 오늘은 아무것도 안 골라도 되나요."
"안 골라도 되오. 나는 여기 계속 있을 테니."
할머니는 국화를 화분 옆, 노란 잎이 자란 그 자리 곁에 가만히 내려놓았소. 흙에 꽂지도, 물을 청하지도 않았소.
"이거, 잠깐 여기 뒀다가… 다음에 와서 마저 고를게요. 그때쯤엔 저 잎도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서."
"그러시오. 국화는 내가 봐 두겠소."
할머니가 뿌리 사이로 다시 올라가는 길은, 내려올 때보다 더 조용했소. 발소리도 없이, 물기 스치는 소리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소.
나는 국화를 손에 들어 봤소. 아직 살아 있는 꽃이었소. 마르지도, 시들지도 않은 채로,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소.
노란 잎 옆에 국화를 놓아두고, 나는 그 화분을 한동안 바라봤소. 예순일곱 해 동안 이렇게 반쯤 남겨 놓고 간 손님은 없었소. 다들 책갈피를 꽂거나, 새 잎을 틔우거나, 둘 중 하나를 들고 올라갔소.
이번엔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채로 갔소. 그것도 나쁘지 않았소. 잎이 노랗게 있는 동안은, 나도 그 옆에 국화 한 송이를 두고 함께 기다리면 될 일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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